루마니아 알기
정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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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1 03:59
복음을 갈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
루마니아는 동구 유럽에서 가장 삼엄한 공산체제를 경험한 국가이다. 오랜 독재정치 아래 국민들의 생활은 핍폐되었고 많은 상처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러한 모든 상황들이 오히려 루마니아인 들에게 복음을 향한 갈망과 소원을 갖게 해주었다. 화가 변하여 오히려 영혼의 복이 된 루마니아인들은 오늘도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느라 분주히 교회로 몰려 오고 있다.
1. 공산주의: 완벽한 이상
칼 막스(Karl Marx) 와 프리드릭 엥겔스 (Friedrich Engels)에 의해 1848년 작성된 공산당 성명서가 70여년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무지와 빈곤의 깊은 수렁으로 빠뜨릴 줄 누가 알았을까! 사회.정치 .교육 분야를 중앙 통제화 하고 생산의 집단체제를 형성하였으며 종교.관습.전통문화 등은 경제 결정론에 의해 이차적으로 취급되었다. 막스와 엥겔스는 가족을 "자본주의 제도, 공공연한 매춘"으로 사회의 목적에 위배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녀들의 건강,교육,영적인 생활 등을 부모들이 돌보는 것은 막시스트 사회에서는 허락을 하지 않았다.
막시스트자들은 공산주의가 사람들의 완벽한 성격개발에 적합하고 이러한 성격이 감정,욕심, 이기주의에 면역되면 완벽하고 우주적인 사람을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분야에서 기술을 습득할 뿐 아니라 우주적인 사람은 범죄, 전쟁, 유아학대, 마약중독, 민족주의 그리고 모든 자본주의 경제 분야에서도 면역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언젠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파괴되고 모든 반사회주의 활동은 사라지며 풍부하고, 균형있고 활기있는 창조적인 사회가 일어날 것이라 했다. 하지만 완벽한 사회건설을 주장하던 막스주의자들의 이론과 사상은 1986년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 초프가 취한 글라스노스트 ( Glasnost ) 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를 따르기 위한 힘든 행보를 해야만했다. 1989년 11월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공산주의의 붕괴는 불가리아, 체코 슬로바키아,루마니아로 이어지면서 세계의 냉전 체제를 종식하였다.
"종교는 아편" 이라 하여 핍박을 당하던 이곳의 성도들에게 한 권의 성경책 이라도 전해주기 위해 온갖 숨은 노력을 다해오던 서방의 교회들에게 얼마나 값진 선물인가! 우리는 북한을 능가하는 독재정치로 유명했던 니콜라이 차우세스크의 나라 루마니아에서 유럽 속의 한국교회를 꿈꾸며 넓고 비옥한 땅의 한 모퉁이를 일구어가고 있다.
2. 루마니아 개요
서쪽의 다뉴브강 줄기와 흑해사이 에 놓여있고 장엄한 산들과 비옥한 농토들로 둘러싸인 루마니아는 공산주의로 구성된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소련, 헝가리, 불가리아, 유고 슬라비아) 빈곤과 무지가 팽배한 채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힘든 행보를 하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남부 유럽 사람들과 비슷한 이들은 2세기에 침공한 로마인들과 자국민인 "다치아인" 들 사이의 결혼으로 로마인의 후예라는 긍지를 갖고 살고있다. 2차대전을 치루면서 보인 변태적 행동으로 "국가가 아닌 집단"이라는 취급을 유럽인들에게서 받기도했으나 지금은 유럽의회에 32번째 회원국이 되었으며 E.C 와 나토가입을 통해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자 애쓰고 있다.
2,400만 인구 중 88%만이 루마니아 인종이며 2백만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과 독일인, 집시 등이 살고있다. 한때는 발칸 반도의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으나 공산주의와 차우세스크의 광적인 통치로 지금은 동구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해있다. 1989년 12월 티미소아라에서 시작된 혁명으로 공산 차우세스크 정권이 무너지고 일루에스크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그대로 가진채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어 개혁의 행보는 느리기만 하다. 공산주의 사회구조 이후 철저하게 분열된 삶으로 인해 소망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활짝 열려진 추수밭이기도 하다.
1) 왕조 시절의 루마니아
5-6세기경 다치아라고 부르는 원주민과 로마 식민주의자들과의 융합으로 라틴계 루마니아 민족이 형성되었으며 국가명은 "로마인들의 땅" 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루마니아인들은 헬라인과 알바니아인들에 이어 발칸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 중 하나이며 터어키,러시아,헝가리 등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를 완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루마니아인들은 두개의 공화국인 몰다비아와 발라치아로 나뉘어 살면서 어떤 때는 터어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한동안은 콘스탄티노플의 헬라 상인들에 의해 다스려지기도 했다. 19세기 오토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몰다비아와 발라치아가 독립을 얻자 1859년에 크루자의 알렉산드라 왕자를 통치자로 선출한 후 1861년에 찰스 왕자가 카롤왕 1세가 되었다. 루마니아인들은 스스로를 헝가리인들과 게르만인들 그리고 슬라브인들과 구별하기위해 프랑스어를 개발하였으며 부쿠레스트를 발칸의 파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와 듀얼군주의 영토인 바나트부코비나를 약속받고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1961년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가 철저하게 패배하였으며 독일인이 부쿠레스트를 점령하고 불가리아인들이 도뷰르자를 되찾아가자 평화를 청원한다. 1918년 루마니아는 연합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의 세력을 의존한다. 그러나 연합군이 터어키와 불가리아를 파괴한 후 다뉴브강을 건너오자 약삭빠르게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후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2차대전시 무정하고 가차없는 보복을 받으며 히틀러의 동맹군에 강요되었으며 소련군의 부쿠레스트 입성을 계기로 45년 동안 비참한 공산주의 치하에 놓이게 된다.
2) 공산주의 시절의 루마니아
1944년 10월 윈스턴 처칠이 모스크바의 스탈린을 방문하여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합의한후 루마니아는 아무런 저항없이 길고 비참한 공산주의의 통치에 들어가게 된다. 1948년 공산주의자들에게 권력이 완전히 이양되면서 비밀 경찰을 통해 국민생활의 모든 영역을 감시받게 된다. 공산당들은 이전의 지도자들을 차례로 숙청하였으며 농업의 산업화와 집단화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이 집단화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농경지를 가지고 있는 루마니아는 기아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1961년 공산당 보고에 의하면 군인들이 집단농업에 강요되기도 했으며 80,000만명 이상의 농민들이 반대하다 시련을 당하기도 했다. 수만명의 루마니아인들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고 180,000명이 징병에 끌려갔으며 완공이 되기도 전에 방치된 다뉴브 흑해간 운하건설을 위해 많은 사람이 강제 노동에 끌려가기도 했고 실제로 이기간
동안 60.000명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많은 정교회들이 새 정권에 팔렸으며 공산주의자 신부들이 주교로 임명된 후 많은 반대자들을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유태인들을 핍박하여 강제이주를 시키기도 하였다. 많은 반대자들을 간교한 계략과 모함으로 제거한 후 게오르게이유 데주 (Gheorghiu Dej)라는 자가 스탈린의 후광을 업고 제 1대 공산당 서기장이며 수상이 되었다. 다른 공산주의 자들이 집단적인 지도력을 작용하며 레닌주의의 근본적인 강령을 주창하는 반면 루마니아 공산당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탈린주의에 철저하게 복종하였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적극 지지하면서 모스크바로부터의 독립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결국 1958년 소련의 마지막 군대가 루마니아로 부터 철수 하자 게오르게이 데주는 경제와 외교정책에서 조심스러운 독자정책을 펼쳐나갔다. 1965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 루마니아 국민의 아며지요, 맏형인" 니콜라이 차우세스크(Nicolae Ceausescu) 가 많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이 되었다.
3) 차우세스크의 독재정치
1967년 대통령이 된 차우세스크는 소련식 공산주의 통치를 탈피하고 이스라엘의 6일 전쟁 이후 외교적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1968년 소련의 체코침공을 반대하고 공개적인 비난을 가하기도 하였다. 곧이어 바르샤바 조약(Warsaw Pact) 가입하였으며 부쿠레스티를 외교적 중심지로 사용하며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서방으로부터 호감을 얻기도 했다. 부인 엘레나와 자녀들 그리고 친척들을 등에 업고 기괴한 성품으로 과대망상적인 독재정치를 편 차우세스크는 스스로를 " 카르페티안 산맥의 위대한 수호신 " 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1988년 그의 70회 생일때 공산당이 차우세스크를 찬양한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철저한 사상교육을 시켰는가를 알 수있을 것이다. "루마니아 국민은 우리의 동지인 니콜라이 차우세스크, 뛰어난 군사적 혁명가요, 영웅 중의 영웅이요, 현대의 건축가인 동시에 백성들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인 차우세스크에게 깊은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라고 하면서 찬양을 하였다. 하지만 차우세스크 자신은 극히 타락한 생활을 했으며 자신의 궁전을 시내의 중심가에 짓기 위해 19세기 많은 건물들을 파괴하였으며 많은 백성들을 무지와 빈곤의 삶으로 전락하게 한 후 자신은 그 궁전이 완공도 되기 전 혁명군들에 의해 총살을 당한 채 커다란 궁전을 떠나갔다.
4) 공산주의가 남긴 상처들
혁명 이후 루마니아에 들어온 사람들은 루마니아의 넓고 비옥한 농토와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촌 그리고 자유로와 보이는 외관의 모습을 보면서 공산주의의 잔악상을 잊게 된다. 우리역시 1990년 이후 단기 전도 활동을 펴면서 복음을 갈망하는 수많은 영혼들 속으로 왔다. 하지만 회칠한 무덤사이로 들어온 것 같은 우리의 선교사역은 고통과 수고의 연속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모든 취미가 금지 당했으며 모든 오락이 폐쇄된 채 모든 생활이 비밀경찰에 의해서 감시되었다. 오직 일하고 음식을 사기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일한 생활이었으며 고기를 사거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위해서는 밤새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개인이 구입할 수 있는 양이 정해지기도 했고 신분증이 요구 되었으며 타 도시에서 여행할 경우 음식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자연히 여행이 제한되기도 하였다. 겨울철에는 난방이 부족하여 하루에 난방사용량이 4시간 밖에 안되었으며 방안의 추위를 피해 따스한 햇빛을 쬐기위해 집밖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전기 또한 충분치 않아 60와트 이상은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외국인과의 대화를 불법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타자기나 컴퓨터 소지자는 경찰에 모두 신고하게 되어있었으며 전화도 두가정이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시민 생활이 감시당하기도 하였다.
인구를 2000년대 까지 삼천만으로 늘이기위해 모든 여자들로 하여금 5명 이상의 자녀를 낳게 했으며 낙태가 금지되고 3개월에 한번씩 의무적으로 부인병에 대한 검진을 받게 하였고 이 모든 것을 감시하기위해 철저한 비밀 경찰을 두고 있었다. 결국 막스주의자들의 주장하던 공산주의의 완벽한 이상은 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대부분의 시민들을 무지와 빈곤으로 전락시키고 막을 내렸다.
오늘날 공산주의가 남긴 상처를 보면 이혼으로 인한 가정파괴와 청소년들의 타락, 권위주의적인 행정, 낡은 주택, 게으름, 빈부격차, 의심, 시기, 질투, 실업률, 이기주의, 무지에 의한 교만, 각종 질병등이 한데 어울려져 있어 주님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마 9:12) " 말씀을 절실하게 한다. 정교회의 영향 아래 있었고 공산주의였던 이곳의 높은 이혼율을(외관상으로는 50% 이상으로 보임)보면 공산주의 체제의 상처를 실감할 수 있다.
19-29세 사이의 인구 5,215,000 명중 결혼한 사람이 196,400 명이고 이혼한 사람이 56,000명이다. 이중 3,455,000명은 활동이 가능하고 2,844,000명은 직업이 있으나 812,000명은 실직자며 나머지는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이다. 0-9세 사이의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젊은 여성들이 1,651,656명이며 15-29사이의 여성인구 2,560,632명 중 아이 하나를 가진 이가 507,632명 아이 두 명을 가진 사람이 317,863명 셋 이상 가진 사람이 150,000명 이상이다.
5) 루마니아의 어려운 경제상황
혁명 이후 3년 동안 내리 마이너스 성장이었으나 1993년에는 농산물 생산의 증가와 몇몇 생산 및 건축의 활기로 해빙무드가 전반적인 경제에 밝은 전망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93년 경제는 극히 제한적인 예금과 외국인 투자의 감소로 아주 어려운 한해였다. 높은 간접세와 관세 그리고 복잡한 행정구조로 외국인 투자가 저하되고 농지와 생산공장 등이 사유화되지 않고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이곳의 경제는 당분간 어려움이 예상된다. 원만한 유통기관과 시장구조의 개선이 있기 전에는 시민생활의 불편이 계속될 것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시민생활이 음식을 구하고 일상 생활 용품을 구하는데 한정되어 있다.
중앙통제의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생산의 감소와 실직이 늘어나는 이곳의 오늘날 상황을 보면 전체 인구의 51.1%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는 데도 부족한 수입으로 최소한의 생활 수단에도 못 미치는 삶을 살고 있으며 60.8%가 보통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 루마니아의 청소년층 현실을 보면 이 나라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실감나게 한다. 70.1% 좀더 심하게 말하면 81.3%의 유아들이 최소한의 생화수단에도 못 미치는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수입의 감소와 빈곤한 생활이 국민생활의 모든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결혼률이 30%이상으로 감소했고 출생률 또한 1989년에 비해 35%가 감소했다. 반면 사망률은 16%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유아 사망률이 높아졌고 자살률 또한 1989년에 비해 4.8%나 치 솟았다. 현재 실직율이 1,263,937명이며 1994년 2.14-21 사이에 매일 2,000명씩 직업을 잃기도 했다. 1989년 이후 시민생활에 대한 조사를 보면 시민으로서의 생활은 자유로와진 반면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 갈등, 빈부격차의 심각성, 성적인 자유로 인한 도덕적 타락과 함께 사회 구석구석에 독버섯처럼 번져있다.
6) 루마니아의 종교
1947년 12월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창설될 때만 해도 12개의 종파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 제국이 생길 떄까지만 해도 루마니아 정교회가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채 정치적, 문화적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중요 종교로 행세하였다. 행정적으로도 코스탄티노플의 대주교나 다른 어떤 정교회의 간섭도 받지 않은 완전히 독립된 정교회였으나 공산주의 통치에 들어 서면서 모든 종파와 활동에 정부의 광범위 하고도 밀착한 통제와 하위급 성직들을 다루기위한 상위 성직자들의 공산당원 포섭, 모든 외국종파와 관계단절 등으로 인해 교회의 힘이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정치적 선전이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무력하게 하였다.
가. 정교회
9세기경 콘스탄티노플의 독립을 인정받은 남쪽의 불가리아인들이 다뉴부강 북쪽인 루마니아니들에게 복음의 영향을 미치면서 시작된 루마니아 교회는 1688년 루마니아 성경을 완역하고 독립한 교회로 발전해 나갔다. 대단히 에큐메니칼적인 루마니아 정교회는 형식상으로는 카톨릭과 유사하면서도 우리의 불교의식을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전통과 성경을 중요한 두개의 수레바퀴라고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전통과 형식에 의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전성 보다 성인들의 도움을 많이 강조한다.
70% 정도가 형식상 정교회인이라 하나 이들의 신앙행위는 교회 앞을 지날때 가슴에 십자가 형태로 손을 움직이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값싼 행위이며 평상시 교회안에 들르기도 하지만 성인들의 사진에 입을 맞추고 가슴에 십자가 모양으로 손을 움직이고 촛불을 켜기까지 2-3분 정도의 행위에 불과하다.
부활절과 성탄절 전에는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 성사가 있기도 하지만 이 역시 지극히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다. 거의 모든 마을과 도시에 교회건물이 있지만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은채 형식적인 교회로 남아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정교회 이외의 교회를 이단이라 가르쳤기에 선교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요즈음은 개신교에 대한 관심들이 많고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성경에 대한 호의가 선교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나. 개신교 선교상황
공산주의 통치기간 동안 예배행위가 금지된 것은 아니고 목사들의 설교가 감시받거나 활동이 제한되었다. 하지만 집회자체는 허락되었으며 이것이 신앙을 유지하는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혁명이 일어난 후 많은 교회들이 개척되고 몇몇 신학교가 생기기도 했지만 도처에 요청되는 지도자들의 부족함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게 한다. 침례교회와 오순절 형제들의 교회등이 복음적인 교회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칠일 안식교가 복음적으로 인정 받고 있기도 한다.. 혁명 전에는 주로 셩경 밀반입과 기독교 문서를 통한 선교가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교회개척을 비롯한 전 분야에 활발한 선교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특별히 문서와 찬양 분야에 광범위한 활동이 요청되며 교회 개척과 양육을 위한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1) 오순절
1920년 루마니아 서쪽에서 시작된 오순절은 정교회와 국가의 반대를 받다 1950년 공식적인 인가를 받았다. 1976년도에는 신학교를 시작하여 현재 100여명이 공부를 하고 잇다. 혁명이후 급격한 정장을 이루고 있으나 구원의 증거로 방언을 해야한다고 하며 많은 기존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고있기도 하다.
(2) 침례교회
19세기에 시작된 침례교회는 정교회와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성장을 가져오고 있으며 부쿠레스트 신학대학에 80여명 오라디아의 신학교에 300여명의 학생들이 있다.
(3) 형제들의 교회
1899년 두명의 영국인들에 의해 시작된 형제들의 교회는 전임 목사제도가 없고 장로회에의해 운영된다. 금년부터 신학교를 시작하여 50여명이 훈련을 받고 있으며 전임 목사제도를 도입하려는 조심스런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학교건물의 부족, 교수의 부족이 목회자의 부족을 초래하여 한 목사가 여러 교회를 담임하다보니 전문 목회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부족한 목회자들이 교회를 담임하다보니 교육의 부제로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정보제한으로 자신들이 가장 훌륭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여진다. 게다가 공산주의가 남긴 상처로 신뢰가 없고 시기 질투가 많으며 권위적인 목회자의 생활들이 루마니아 교회가 풀어야할 큰 숙제라 보여 진다. 그밖에 여름이면 수많은 전도단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각종 전도활동과 구제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더디기만 하다.
7) 루마니아 문화
가. 인사: 인사를 할때는 이름을 사용하여 보통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에게만 사용한다. 그러나 어른은 보통 젊은 사람들의 이름을 자주 사용한다. 가장 정중한 인사로 사람의 호칭을 성 앞에 붙여 사용한다(예:박사, 교수, 회장). 성인들의 보편적인 인사는 악수로 하며, 여자와 악수를 한다면 여자가 손을 내어밀 때까지 남자가 기다린다.
나. 방문: 손님에게는 보통 커피, 차, 브렌디 또는 포도주 등이 마실 것으로 제공되다. 저녁 초대를 받을때는 정중한 태도로 손님이 3-5 송이의 꽃을 주인에게 선물 한다. 주의할 것은 빨간 장미는 애정의 표시라는 것이다. 이들은 아침 7시에 일을 시작하므로 저녁에 방문할 경우 11시 전에는 집을 나와야 한다.
다. 가족 : 평균 3명 정도가 한 가족이다. 도시인 가족이 시골인 보다 적은 것은 도시생활이 비싸기 때문이다. 45%정도의 여자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은 지배적이다.
라. 사회 경제수준: 대개의 아파트는 두개의 침실과 발코니, 화장실, 샤워실이 분리된 집이다. 오래된 집은 중앙 난방식이 아니고 개인 난방식이다. 사회계급은 서구와 같지는 않지만 교육 수준과 공산당 회원에 의해 구별된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예: 의사, 교수, 변호사) 이 상류층에 속한다. 또한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운 친구끼리 작은 그룹으로 사회 활동을 많이 한다.
마. 식생활: 유럽식(대륙식 관습)으로 왼손에 포크를, 오른손에 칼을 쥐고 먹는다. 레스토랑에서는 미네랄워터를 주문할 수 있다. 대개 점심이나 저녁은 구운 빵을 곁들인다. 주문하기전에 웨이터에게 어떤 음식이 제공될 수 있나를 묻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자주 손님으로 초대되기도 한다. 빵은 항상 구입이 가능하며, 신선함 과일과 채소는 그 계절에만 가능하다. 아침은 계란과 치즈, 롤빵, 커피가 주이며, 점심은 하루의 주요 식사로 스프와 고기, 감자와 빵, 채소를 먹는다. 와인이나 맥주가 주요 음료이다.